80년대와 너무도 다른 지금을 산다

소설가 '현기영' 하면 누구나 제주도를 떠올릴 것이다. 그의 소설 속 제주의 풍경은 한없이 아름답기만 한데 특이하게도 그 아름다움은 아이를 품은 어머니처럼 사람들의 슬픔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아름다운 섬에서 일어난 끔찍한 비극 '제주 4.3사건'. 소설가 '현기영'은 결코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이 사건의 아픈 기억을 그의 소설 속에 날 것 그대로 풀어놓곤 했다. 그의 장편 '지상의 숟가락 하나'가 그랬고 소설집 '순이삼촌' 또한 그랬다. 꼭 4.3사건이 아니더라도 그의 소설 속엔 항상 제주가 등장했다. 제주가 배경인지 아니면 제주 자체가 소설 속 주체인지 헷갈릴 정도로 제주는 그의 소설 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현기영의 새 장편 소설 [누란]에는 제주도가 등장하지 않는다. 

서울 남산 소파길의 동쪽 끝에는 '서울특별시 균형발전본부'라는 건물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이 건물은 안기부 '6국'이라 불렸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에게 두려움 자체였던 그곳. 학원 사찰과 수사를 담당했다고 한다. 때는 80년대의 어느 날. 대학생 '허무성'이 형사들에게 이끌려 잡혀온 곳이 악명높은 남산 기슭의 한 지하실이라고 하니 아마도 안기부 '6국'의 지하 조사실이었을 게다. 소설 [누란]은 '허무성'이라는 한 젊은 지식인의 기구한 삶의 전말에 관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야기는 '허무성'이 지하실에 잡혀들어 오면서 시작된다.

체포된 첫날부터 불문곡직 매질이 시작됐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몽둥이 찜질로 자신도 모르게 똥을 싸고 만 '허무성'. 문득 어렸을 때 보았던 개를 잡는 장면이 떠오른다. 목에 밧줄을 걸어 개를 전봇대에 매달은 다음, 몽둥이로 사정없이 후려치던 어른들. 개는 혼비백산하여 발을 허우적거리면서 똥을 싸질렀다. 제 의지로 그런게 아니니 똥을 쌌다는 말보다는 똥을 흘렸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허무성'도 그렇게 전봇대에 매달린 개처럼 혼비백산하여 똥을 흘렸을 게다. 이튿날은 물고문이 시작됐다. 물고문은 그의 남은 인격마저 남김없이 부숴버리고 만다. 허무성은 반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동료들의 이름을 말하게 된다. 지하실에 끌려온 지 하루 반. 남은 것이라곤 부서지고 찌그러진 영혼과 배신자라는 낙인.    

고문을 하던 그들 속에 검은 색 정장을 입은 '김일강'이 있었다. 악마처럼 무자비하던 그는 허무성이 자백을 하고 나자 놀랍게도 친형처럼 살갑게 돌변한다. "어때, 죄다 불고 나니까 시원하지? 그래, 울어야지.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질 거야." 다정한 말투와 함께 건네는 담배 한 개피. '김일강'은 지금까지 너를 눈여겨 봐왔다고, 니가 아주 맘에 들었다고, 앞으로 너의 뒤를 봐주겠다는 말로 '허무성'을 회유한다. '허무성'에게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 그에게는 이미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버렸고 그의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이마저도 배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외면하고 만다. 그후 '허무성'은 '김일강'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역시 '김일강'의 연줄로 대학 교수가 된다.  

그는 행복했을까. 남산의 지하실에 보낸 하루 반의 시간과 '김일강'에 대한 기억은 그의 삶 내내 따라다니며,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허무성'은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 지하실 안의 '김일강'은 그를 끝내 놓아주지 않는다. 소설의 대부분은 대학교수 '허무성'이 현재를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80년대라는 정신적 외상을 가진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90년대와 현재를 말하고 있는듯 보인다. 세계화와 신자본주의라는 물결로 인해 너무나도 변해버린 세상. 소설 속, 대학교수 '허무성'과 학생들사이의 대화는 이러한 변화의 극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진지함이 웃음거리가 되는 사회. 학생들은 매사 진지하고 부정적인 '허' 교수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너무나 자유로운 이 시대에 '허무성'은 더이상 배신자가 아니다. 무엇에 대한 배신이었을까. 사람들은 그런 것 따위에는 이미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 걸 생각하기엔 세상은 재미난 것들로 가득차 있고, 행복하게 살기에도 바쁜 사람들에게 그런 걸 생각할 겨를 따윈 없는지도 모른다. 국회의원이 된 '김일강'. 그의 머릿 속은 오로지 두 가지 것으로만 꽉차 있는 듯하다. 박정희와 파시즘. 그는 이 둘의 맹목적인 추종자이다. 아, 그리고 또 하나. 그들 세력을 하나로 결집시켜주는 '교회' 라는 이름의 신성한 장소. '김일강'은 '허무성'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허무성'에게 끊임없이 접근한다. 그는 결코 '허무성'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 '허무성'을 삼켜버리고 말 것이다. 

이처럼 꽉 막힌듯 보이는 현실에서 '허무성'은 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김일강'의 무자비한 손아귀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초라하게만 보이는 주인공이지만 그가 자신의 과거를 이겨내고 그만의 길을 갈 수 있기를 응원해 본다.


이미지 출처: http://image.yes24.com/goods/3498248/L    

by cuspymd | 2009/10/01 01:09 | | 트랙백 | 덧글(0)

오늘은 즐거운 네버랜드의 축제날

며칠 전 EBS의 음악 공연 프로인 '스페이스 공감' E554 를 보았다. 이 프로 꽤나 신기하지 않나? '스페이스 공감'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이 프로를 보고 있으면 내 삶이 한 뼘 정도 고상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수준보다 또 한 뼘 정도 격상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래서 이 프로가 좋다. 조그마한 무대 위에 차분한 조명, 다소곳이 앉아 음악을 감상하는 관객들, 그리고 정말 예술가 같은 가수와 밴드. 이 무대 위에 서서 노래를 부르면 그네들은 더욱 진지해 보이고 열정이 넘쳐 보인다. 목소리는 감미롭고 진솔하게 들린다. 때로는 너무 차분해서 하품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 프로에는 이 프로만의 아우라가 있고 그 아우라가 가수와 관객은 물론 나의 삶까지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게 아닌가 하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E554 에 나온 팀은 '엘리스 인 네버랜드'. 처음 듣는데도 그네들의 음악은 해맑고 즐거우며 상쾌하고 경쾌하다. 무릎 위에서 통통 튀는 것만 같다. 그래, 마냥 살아가야 하는 삶이라면 꼭 이 음악과 같아야 하지 않을까. 통통 튀고 즐겁고 경쾌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거 아닐까.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경쾌한 기타 소리가 그 옆에 나란히. 변덕스런 피아노 소리는 어느 틈에 삐진걸까 뾰루퉁한 표정으로 두어 걸음 뒤쳐져 따라온다. 개구쟁이 드럼은 오늘도 신나서 천방지축 뛰어 다니고 무뚝뚝한 베이스는 오늘은 왠일인지 모두를 따듯하게 다독인다. 개성이 강한 그들은 사이좋게 놀다가도 금방 싸우고 토라지곤 하지만 신기한 건 그렇게 티격대격 싸우고 울고 웃으면서도 모두들 같은 곳을 향해 걷고 있다는 것이다. 그곳은 바로 네버랜드. 그리고 오늘은 네버랜드의 즐거운 축제날. 

세상에는 사람들이 오밀조밀, 아웅다웅 살아가고 있다. 웃고 울고 즐겁고 슬퍼하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낮과 밤, 아침과 점심. 어제는 비가 오고 오늘은 해가 뜨고.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 언젠가 눈이 오겠지. 눈이 오면 슬퍼하는 트럭 운전사와 눈이 오면 좋아서 방방 뛰는 트럭 운전사의 철없는 아들. 그리고 이들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한 잠수부가 있다. 보통, 꿈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며 머리 위 높은 하늘을 올려다 보곤 하지만 잠수부는 자신의 꿈을 이야기할 때마다 칠흑색 바다를 내려다 보곤 했다. 왜 바다가 칠흑색이냐고? 그야 잠수부가 꿈을 이야기하던 때가 칠흑 같이 어두운 가을 밤이었기 때문이다. 꼭 오늘 같이 캄캄한 가을 밤이면 잠수부는 깊은 바다 속으로 하염없이 하염없이 침잠해 들어가는 꿈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리고 새벽 동이 터올 무렵이면 그가 바다 가장 깊은 곳에서 우연히 마주한 어느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신세계에 대해 이야기해 주곤 했다. 그곳은 바로 네버랜드. 그리고 오늘은 네버랜드의 즐거운 축제날.

'잠수부의 운명'은 엘리스 인 네버랜드'의 두번째 앨범 [Festa in neverland]의 10번째 곡이다. 마침 스피커에서 운명처럼 이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다. 가을 밤 하늘이 유난히 칠흑빛 바다처럼 검게 반짝인다. 거기 한 가운데 검은 파도 사이로 잠수부의 부표가 별처럼 홀로 반짝인다. 잠수부가 내쉰 공기방울들이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바다 위로 떠오르는 것만 같다. 더 깊이, 더 깊이. 잠수부가 어서 깊은 바닷 속 네버랜드에 가 닿을 수 있기를. 오늘은 네버랜드의 즐거운 축제날. 잠수부가 어서 네버랜드의 즐거운 축제에 나를 초대해 주기를 바라며 하염없이 중얼거려 본다. 더 깊이, 더 깊이...  

by cuspymd | 2009/09/25 01:36 | 트랙백 | 덧글(7)

관계에 대하여

이웃 블로거 나스타님께서 며칠 전 오토바이 사고를 목격하신 듯 하다. 오토바이를 타고 있던 청년은 도로에 널브러졌고 나스타님이 보는 앞에서 죽어갔다고 한다. 청년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도한 나스타님은 심적으로 큰 충격을 받으신 것 같다. 글을 읽으면서 나는 청년의 죽음을 애도했지만 그 죽음이 나에게 큰 울림을 주지는 않았다. 마치 신문의 사고 사례란을 보는 것처럼 덤덤했다. 오늘의 교통사고 몇 건, 사망 몇 건, 부상 몇 건.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면 달랐을까. 아마 내가 그 사고 현장에 있었더라도 신문 속 오늘의 사망자 수를 읽는 것처럼 무료하게 청년의 죽음을 읽어내지 않았을까.

대학생 때니까 그리 오래 전 일은 아니다. 그 때는 내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의 중간 상태. 내 자신이 딱 그 중간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좀비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좀비와는 성질이 정반대라 봐야한다. 좀비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긴 하지만, 하여 피부는 썩어가고 여기저기 살점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지만 특이하게도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잠도 안 자고 지치지도 않고 오로지 맹렬히, 그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산 자의 피를 끊임없이 갈구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생명력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그 어떤 것도 욕망하지 않았다. 아무런 이유나 의도 없이 단지 어제를 살던 습관으로 오늘을 살아가곤 했다. 습관으로 지탱되는 삶. 그것은 꼭 살아있는 거라기엔 너무 가볍고, 죽어있는 거라기엔 너무 무거운 듯 했다.  

그 때는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살아있는 게 무엇이라 생각했길래 자신이 살아있지 않다라고 느꼈던 걸까. 그때의 삶에서 빠져있던 그 무언가가, 살아있다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때보단 더 나이를 먹은 지금. 그 시절 빠져있던 것의 정체가 혹시 우리가 '관계'라 부르는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관계. 타인과의 관계. 아니 꼭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나 아닌 다른 무엇과의 관계. 그 관계가 있을 때야 비로소 살아있는 것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은 든다.


며칠 전에 [타인의 삶]이란 영화를 봤다. 구 동독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정보국에서 일하는 한 사내가 어느 예술가 부부를 감청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한 평생 국가를 위해서 일해온 이 늙은 사내는 감정이란 게 있기는 한 것인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메마르고 건조하기만 하다. 그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감시하고 감청하고 또 신문하는 일이다. 이런 일을 평생 해온 사람에게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더 신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늙은 사내는 그저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다. 한 눈 파는 일 없이 오로지 감청, 감시, 신문에만 몰두하니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무서운 사내의 감청 대상이 되어버린 예술가 부부. '독 안에 든 쥐'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닐까.

그렇다. 꼭 '독 안에 든 쥐' 였다. 결코 빠져나갈 수 없었다. 늙은 사내가 변하지 않았다면 그들 예술가 부부는 늙은 사내의 손아귀에서 결코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이 늙은 사내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알던 사내가 그들 부부의 삶에 관계하기 시작했다. 대체 왜 감청의 프로페셔널인 그 늙은 사내는 그들 부부의 삶에 관계하려 했던 걸까.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과 삶의 토대가 무너질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왜 그들 부부의 삶에 끼어 들어 그들을 지켜주고자 했던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대학교 때의 내가 느꼈던 것처럼 아마 그 늙은 사내도 자기 자신이 살아있지 않다라고 느낀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늙은 사내는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끼여 그저 습관처럼 타인을 감시하는 자신의 삶에서 살이 썩어가는 듯한 부패의 냄새를 맡은 것인지도 모른다. 식어있는 자신의 삶에 따듯한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사내는 타인과의 관계를 희망한 것은 아니었는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감동을 더 크게 느끼고 싶으신 분은 이후의 글을 읽지 말아주세요.) 시간이 흐른 후 통일된 독일의 어느 화려한 극장. 늙은 사내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작가의 연극이 성공리에 공연되고 있다. 우연한 대화를 통해서 작가는 동독 시절 자신의 아파트가 감청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순간 작가는 의아해 한다. 자신의 아파트가 감청되고 있었다면 분명 자신은 무사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에. 작가는 정보부의 옛 문서를 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로소 작가는 그들의 삶에 관계했던 늙은 사내의 존재를 알게 된다. 암호명 "HGW XX/7". 작가는 바로 늙은 사내를 찾으러 달려가지만 무슨 맘을 먹었는지 늙은 사내의 코 앞에서 차를 돌리고 만다.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난 어느날. 늙은 사내는 감시가 아닌 평범한 일을 묵묵히 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늙은 사내는 우연히 서점 앞을 지나던 중 작가가 새로 낸 책의 포스터를 보게 된다. 책의 제목은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 그냥 무심히 지나칠 수는 없었다. 오래 전 작가가 슬픔에 겨워 연주하던 곡의 제목이었으니까. 감청하던 늙은 사내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던 바로 그 곡이었으니 말이다. 서점 안으로 들어 간 늙은 사내는 책 한 권을 들어 표지를 넘겨 본다. 그리고 비로소 작가가 늙은 사내에게 남긴 메시지를 보게 된다.

이즘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 [러브레터]에도 이와 비슷한 가슴 뭉클해지는 마지막 장면이 있었다. 띵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갑작스레 찾아온 학교 후배들. 다들 무엇이 그리 신이 났는지 추운 겨울 바람에도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그리고 불쑥 내미는 책 한 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뒤에요, 뒤. 아이들이 조바심을 내며 외친다. 마지막 장을 펴고, 독서 카드를 꺼낸다. 그리고 뒤집어 카드의 뒷면을 바라본다. 클로즈 업되는 여주인공의 얼굴.

그들이 책에서 찾은 것은 희미하게 잊어가고 있던 관계의 흔적은 아니었을지. 그 관계의 흔적을 통해 생의 감동을 느끼고, 그 순간 자신이 살아있다라는 사실을 맹렬하게 실감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산다는 건 바로 그런 관계의 실감이고, 그로 인한 가슴의 벅참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 하루다.

이미지 출처: http://image.cine21.com/resize/cine21/poster/2007/0214/M0010007_poster%5BH585-%5D.jpg

by cuspymd | 2009/09/23 02:54 | 영화 | 트랙백 | 덧글(2)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조삼모사'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중국 송나라 때 저공이란 사람이 원숭이를 키웠다고 한다. 원숭이를 무척이나 좋아한 저공은 무리를 이룰 만큼 많은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공의 집안 사정이 나빠져 원숭이에게 주는 먹이를 줄여야만 했다. 한참을 고심하던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가서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한다. 앞으로 먹이는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도록 하마. 이를 들은 원숭이들은 물론 불같이 화를 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몸을 미친듯이 흔드는 녀석,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녀석, 고릴라처럼 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녀석. 이처럼 화내는 방식도 가지각색. 다시 저공은 짐짓 양보하는 척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도록 하마.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엎드려 기뻐했다고 한다.

물론 원숭이를 좋아했던 저공은 원숭이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이런 꾀를 부렸던 것이지만 지금 이 '조삼모사'라는 사자성어는 간사한 꾀로 남을 속여 회롱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만약 저공이 안다면 무덤 속에서 통곡을 할 일이다. 이래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하지만 저공의 억울함을 말하기 위해 이 얘기를 꺼낸 건 아니다. 이 얘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건 바로 원숭이의 단순함이다. 결국엔 일곱 개로 같은데 지금 당장 네 개를 준다는 말에 혹하는 멍청한 원숭이들.    

하지만 원숭이들이 실제로도 이 저공의 고사에서와 같이 멍청하고 단순할까? 인터넷에서 자주 본 동물원 동영상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동물원의 원숭이 우리 앞. 한 어린애가 철망 앞에 바짝 다가가 먹을 것을 내민다. 얼굴엔 심술보가 가득한 이 어린애. 척 보기에도 지독한 장난꾸러기처럼 생겼다. 먹을 것을 받기 위해 원숭이가 손을 내밀면 어린애는 재빨리 손을 빼고, 닿을락 말락 닿을락 말락한 거리에서 어린애는 원숭이를 놀려 먹는다.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의 어린애. 카메라를 보며 환하게 웃는 찰나, 화가 난 원숭이가 철망 사이로 팔을 길게 쭉 뻗어 웃고 있는 어린애의 머리통을 후려갈긴다. 어따 속 시원한 거. 어린애가 그닥 다치지 않았다면 십년 묵은 채증이 쑤욱 내려가는 걸 느끼며 원숭이의 영특함을 칭찬하게 된다. 오해는 마시라. 어린애는 참말 지독한 장난꾸러기였으니 말이다. 

앞의 사례에서 보듯 원숭이가 실제로는 영특한 동물인데도 이 책은 남우세스럽게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만약 원숭이가 안다면 화가 난 원숭이가 철망 사이로 빨을 길게 쭉 뻗어 저자의 머리통을 후려갈기지 않을까. 좀더 얌전한 녀석들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몸을 흔들거나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고릴라처럼 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릴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제목은 영특한 원숭이들의 화를 돋구겠지만, 책의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원숭이도 이해할 만큼 쉬운게 사실이다. 쉽다는 것은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의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이란 책을 읽어 본 적은 없다. 엄청난 분량에다 아무나 접근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책이라 상상해 본다. 아주 오래 전 마르크스의 전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마르크스가 글을 쓰면 엥겔스가 그 글을 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쓰곤 했는데 가끔 혹은 자주 마르크스가 쓴 글의 핵심이 무엇인지 엥겔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 일화가 얼핏 기억난다. 이 책이 제목부터 쉽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실제 '자본론'이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지를 방증하는 증거가 아닐까.
 
이 책은 표지에서 사람들이 자본론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을 지적한다. 이 책의 표지는 자본론은 사회주의를 말하는 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본론]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자본론이란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본주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분석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표지는 자본론이 자본주의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그 현실을 분석하고 있으니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관심이 없어서 자본론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람들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말까지 한다. 가벼운 제목 답지 않게 표지부터 꽤 도발적이지 않은가. 나 역시 자본론은 사회주의에 관한 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자본론이 자본주의를 분석한 책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럼 이 책에는 사회주의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 책의 저자 '임승수'는 꽤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다. 이 책의 표지를 고대로 믿은 어느 자본주의 신봉자가 이 책을 읽었다면 아마도 위의 원숭이처럼 방방 뛰며 화를 내지 않았을까. 이 책은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지만 그래도 결론은 사회주의이다. 자본주의의 여러 폐해와 결함들의 근본 원인이 자본의 자기 증식이라는 자본주의의 원리 자체에 들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결코 개선될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니 책의 결론은 사회주의가 될 수 밖에 없다.

원숭이를 어르려 꾀를 냈던 저공처럼 이 책의 저자 또한 꾀를 내어 자본주의를 더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들게 한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본주의를 코너로 몰아 원투 펀치를 날린다. 그로기 상태가 될 때까지 사정없이. 이윽고 다가오는 결정적 순간, 비척대는 자본주의에게 저자는 '사회주의'라는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것이다. 원, 투, 쓰리...

자본주의를 알고 싶어 이 책을 든 사람이 자본주의가 들것에 실려나간 쓸쓸한 링 위에서 홀로 사회주의를 마주했을 때, 이 사람은 자리에서 방방 뜨며 화를 내게 될까 아니면 자리에 엎드려 기뻐하게 될까.  



이미지 출처: http://image.aladdin.co.kr/cover/cover/8959401331_1.jpg

by cuspymd | 2009/09/22 01:36 | | 트랙백 | 덧글(4)

10인의 만화가와 함께 나도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다

2003년에 국가인권위원회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만화책이 있다. 10명의 만화가가 모여 인권이라는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다양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십시일반'. 익숙한 사자성어인데 막상 무슨 뜻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검색해 볼까.

십시일반(十匙一飯)[-씨--]
명사
밥 열 술이 한 그릇이 된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이 조금씩 힘을 합하면 한 사람을 돕기 쉬움을 이르는 말.


이렇게 좋은 뜻이었나. 내가 좋아하는 "연대"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래서 제목만 읽어도 기분이 괜스레 좋아진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을 자세히 보니 마지막 글자인 '반'의 한자 표기가 좀 다르다. 책의 제목은 "십시일反". 열명이 모여 만든 책 한권으로 세상의 차별에 맞서 보겠다는 뜻이란다.

포부는 좋지만 고작 열명의 힘으로 차별에 맞설 수 있을까. 허황된 소리다. 단지 열명으로만 그친다면 그건 분명 허황된 소리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사람들도 같이 세어보면 어떨까. 책이 나온지 이미 6년이나 지났으니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수 또한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찾아 읽게 될 많은 사람들도 빼놓으면 안 된다. 이 모든 사람들을 헤아려 보자. 이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한다면 세상의 차별을 없애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만화라서 그런지 다 읽는데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자극적인 소재나 매력적인 이야기를 가진 만화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이런 만화를 읽는다는 건 무척이나 심심한 일이다. 책을 내려놓는 순간에도 갈증이 채 가시지 않은 기분이지 않을까. 인권이란 건 어려운 사상이나 담론같은 것이 아니다. 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사소한 일상이나 우리의 곁에서 늘상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것일 수 밖에 없다. 너무나 사소하고 너무나 일상적인 이야기들이지만 그 속에 숨어든 배제와 차별, 편견이라는 독을 보지 못한다면 이 만화는 여전히 밋밋한 것일 수 밖에 없다.

다  읽었다고 쉽게 던져버릴 수 있는 만화가 아니다. 타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이미 무감각해져 있는 내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곤한다.  

  
사진 출처: http://image.yes24.com/goods/387677/L

by cuspymd | 2009/09/18 01:18 | 만화 | 트랙백(1) | 덧글(2)

신문을 똑똑하게 읽자

"신문을 똑똑하게 읽자." 무슨 말일까? 기사의 요지를 잘 파악해야한다는 뜻인가?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야한다는 뜻인가? 하루치 신문에는 많은 분량의 기사가 있으니 빠르게 한 번만 훑어봐도 무엇에 관한 기사인지를 잘 파악해야한다는 뜻인가? 이 모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똑똑하게 읽는다는 것은 그런걸 의미하는게 아니다. 신문이 우리에게 마법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교묘히 우리에게 마법을 걸고 있다. "아브라카타브라~ 아브라카타브라~"

거참, 인터넷 신문을 종일 끼고 사는 나지만 신문이 내게 마법을 걸고 있는걸 여태 몰랐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따름이다. 신문 기사는 항상 사실만 말하는줄 알았다. '그럼 신문이 거짓을 말한다고?' 라며 의아해하시는 분들 많을 것이다. 완벽하게 객관적인 사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에이 그런 얘기였어?' 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분들은 이렇게 말을 이을 것이다.

"완벽하게 객관적인 사실이 어디 있냐. 그 사실을 보는 시선이 있을 뿐이고, 그 시선에 따라 각자 사실을 해석하는 거지. 다들 그러잖아. 여태 그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야. 너 꽤 순진한 녀석이구나. 완벽하고 절대적인 사실이라니 터무니 없지. 구로사와 아끼라의 '라쇼몽'이란 영화를 봐봐. 같은 사건을 두고 사람들이 모두 딴 얘기를 하고 있다고. 모두들 자기 자신에 유리하게 말이지.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취하고 불리한 건 덜어내 버리는거야. 각자가 보고 기억하는 사실이란 이렇게 불완전한 것들 뿐이지."

물론, 나도 안다. 완벽하게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신문 기사라는 것도 기자의 시선을 거쳐 해석된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우리가 쉽게 깨닫지 못하는 신문의 마법. 이것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문의 '표제'가 가지는 중요성을 이해해야만 한다. '표제'가 뭐냐고? 기사의 제목 말이다.

손석춘이 쓴 [신문 읽기의 혁명]에서는 '표제'는 제목과 분명히 다른 것이라고 구분 짓는다. 그래서 신문에는 제목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표제'라는 말을 써야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기사의 '표제'가 단순히 기사의 요약이나 핵심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표제'에는 제목에는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바로 '가치 판단' 이란 것이다. '표제'에는 편집자의 적극적인 가치 판단이 들어간다. 바로 이 가치 판단이 신문을 읽는 독자들에게 마법을 부려서, 독자들이 '표제'대로 생각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기사의 '표제'를 그 기사를 직접 취재한 기사가 쓸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생각이다. 기사를 쓴 사람이 표제도 짓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신문사의 내부 구조를 보면 취재부와 편집부가 나뉘어져 있다. 취재부에 속한 취재 기자가 그 날의 기사를 신문사에 통고하면 편집부는 그 기사를 검토하고, 혹 필요하면 편집도 하며 그 기사의 '표제'를 정하고 그 기사를 신문의 어느 지면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재밌는 사실은 기사의 실제 내용이 그 기사의 '표제'를 정하는 데 있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이 사건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이다. 무엇을 말함으로써 신문의 독자들이 무엇을 보게 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독자들은 '표제'가 말하는 것만을 기사에 읽게 된다. 하지만 이 마저도 기사를 챙겨읽는 부지런한 독자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기사의 '표제'만을 읽고 넘어간다. 이때 '표제'는 오롯이 독자들에게 흡수되어 그들의 생각을 대변하게 되는 것이다.

[신문 읽기의 혁명]은 이러한 신문의 가치 판단이 '표제'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문의 편집, 그러니까 여러 기사들 중 어떤 기사를 1면에 실을 것인지, 어떤 기사의 '표제'를 다른 기사의 '표제'보다 크게 배치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판단이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는 곳이 신문의 '사설' 이라고 말한다. 하여 '사설'을 읽은 다음에 신문의 1면 기사의 배치를 보면 그 신문이 말하는 바,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있다고 말한다.

신문의 가치 판단과 확실한 거리를 유지하며 신문이 우리에게 교묘하게 강요하고 있는 것을 비판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 비로소 우리는 신문을 똑똑히 읽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http://image.libro.co.kr/book_img/4998/0a0000164436_00.jpg
 

by cuspymd | 2009/09/16 00:59 | | 트랙백 | 덧글(5)

행복한 정글에 어서 오세요.

"행복한 정글에 어서 오세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행복을 꿈꾸며 향하는 정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고 사랑과 꿈, 돈과 성공이 함께하는 행복한 정글에 어서 오세요."

리투아니아의 촌뜨기 유르기스는 머리에 든 건 없지만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 여태껏 어느 누구에게도 힘으로 지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불한당이나 건달은 아니다. 그는 무척 부지런하고 훌륭한 농사꾼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사랑에 빠진다. 시골 장터에 나갔다 우연히 어린 소녀 오나를 보고 한 눈에 반해버린 것이다. 하늘에 내려온 것만 같은 작은 천사 오나. 그는 오나의 집에 달려가 그녀의 가족들에게 오나와 결혼시켜 달라고 간청한다. 그녀의 가족이 가진 것도 별로 없어 보이는 이 무식한 유르기스에게 자기의 소중한 딸을 그렇게 덥석 내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집안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끈질긴 유르기스의 노력으로 둘은 미래의 결혼약속을 받아냈고 그 둘은 서로 사랑에 빠졌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꾸게 되고 지금보다 더 나은 행복을 원하게 되기 마련이다. 유르기스와 오나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삶과 행복을 바랐다. 때마침 저 바다 건너 먼 나라 아메리카에서는 거지도 부자도 모두 행복하게 살며 가난한 사람도 일만 하면 높은 돈을 받는다는 소문이 거리마다 파다하다. 며칠 간의 심사숙고와 토론을 거쳐 마침내 유르기스와 오나,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아메리카로의 이주를 결정한다. 드디어 그들은 행복과 성공의 부푼 꿈을 안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향한다. 길고 지루한 여행 끝에 그들은 마침내 시카고의 식육 공장 지대에 도착하게 된다.

심장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사랑에 빠진 이 두 연인과 그의 가족들이 새롭고 낯선 아메라카라는 땅에 잘 정착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진정 바랄 것이다. 물론 많은 시련과 고난이 있겠지만 그래서 울고 상처받고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가족이라는 따듯한 유대의 끈으로 서로 뭉쳐서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들의 기반을 닦고 자신들의 삶을 당당히 일구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을 것이다. 얼마나 감동적일지 생각해 보라. 분명 감정이 풍부한 몇몇은 눈물까지 훔치리라고 본다.

하지만 이 소설책, 미국 작가 '업튼 싱클레어'가 1906년에 쓴 [정글]은 우리의 기대를 무참히 조각낸다. 장장 588쪽에 달하는 이 두껍디 두꺼운 책 안에서 변변한 희망 하나를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예상했던 것 처럼 책에는 많은 시련과 고난이 나온다. 무참하다는 말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많은 시련과 고난이 저 불쌍한 가족들을 끝없이 괴롭힌다. 세상에 지옥이라는게 존재한다면 지옥은 꼭 이런 모습일거라고, 지옥에서 사는 사람들은 꼭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저 불쌍한 가족은 이 두꺼운 분량의 소설 내내 마소처럼 끝없이 일하고 끝없이 굶주리며 시름시름 죽어간다. 이들의 무참한 삶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묵묵히 책장을 넘기는 것 밖에 없다.

불쌍한 유르기스. 시카고의 식육 공장 지대에 도착한 그에게 두려움이란 없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겠어." 거리는 언제나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로 넘쳐났지만 그는 덩치가 크고 힘이 셌다. 그는 현실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열심히 일할 자신이 있었고 누구보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기대대로 그는 일자리를 구하러 나간 첫날 바로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받는 돈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이후 그들 가족에게 많은 시련이 닥치지만 그때마다 그는 이를 악물면서 되뇌이곤 했다. "좀더 열심히 일하겠어."

식육 공장의 기계는 최대의 효율을 위해 가장 빠른 속도로 맞춰진 것이었다. 공장의 일꾼들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기계의 속도에 맞춰야만 했다. 하지만 결코 사람이 기계의 속도에 맞출 수는 없었다. 일꾼들은 결코 오래 버틸 수 없었고 빈 자리는 새로운 일꾼으로 대체되었다. 유르기스는 남들보다 빠르고 힘이 셌기 때문에 쉴새없이 돌아가는 기계의 속도에도 맞출 수 있었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아니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정신없이 일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기계 속의 부품처럼 그 자신의 몸이 조금씩 조금씩 마모되고 있다는 것을. 사고는 느닺없이 찾아왔고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그들 삶의 균형도 순식간에 깨어졌다. 그는 점점 병들고 야위어 갔다. 그는 결국 고장난 부품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전전했지만 아무도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불쌍한 오나와 그의 가족. 유르기스의 벌이만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들 모두 일을 해야했다. 처음엔 유르기스가 반대했지만 생활고 때문에 작고 여린 오나도 공장에 나가야만 했다. 애들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모두가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그날 저녁을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점점 지쳐갔고 점점 가난해졌다. 모두가 하루종일 일했는데도 조금씩 다가오는 파국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불쌍한 가족은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그들은 하루도 쉬지않고 죽도록 일했는데도 비참한 삶의 굴레에서 조금도 벗어나질 못했다. 이 책의 마지막은 모든 것을 잃은 유르기스가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뜨며 끝을 맺고 있지만 21세기의 현실을 아는 나에게는 큰 위안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다시 소설의 첫 부분. 시카고의 식육 공장 지대에 막 도착 이들 가족은 돼지고기를 가공하는 공장을 견학하게 된다. 생전 처음 보는 끔찍한 광경에 그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이렇게 속삭인다. "끔찍해라, 내가 돼지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네!" 하지만 불행히도 현실은 그들의 생각 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것이었다.
 

p.s 문화웹진 '나비'에 [정글]의 서평이 실렸다.
전문적이면서도 재밌는 글로 같이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문화 웹진 나비에 실린 '정글' 서평]

그림 출처: http://jin.booksetong.com/images_book/book_370000/book_370987_l.jpg

by cuspymd | 2009/09/10 02:32 | | 트랙백 | 덧글(2)

파란 만장한 자본주의씨의 일대기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세계사에서 중세의 유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늘은 하루종일 날씨가 우중충했다. 아침엔 안개가 잔뜩 끼어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안개가 개인 후에도 하늘이 내내 흐렸다. 잔뜩 낀 구름 너머로 해가 정말 떠 있기나 한건지 의심스러웠던 스산한 하루. 중세 시대 유럽의 날씨도 꼭 이랬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중세라 칭하는 천년 간의 길고 긴 시기 내내 이런 날씨가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을 것만 같다. 내가 배웠던 세계사에선 중세 시대는 암흑의 시대였다. 르네상스라는 광명을 위해 존재하는 천년 간의 긴 암흑기. 인류는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나 비로소 르네상스라는 여명을 맞이했고 근대라는 찬란한 빛의 시대를 향해 달려왔다는 것. 이것이 내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세계사의 고갱이다.

미국의 진보 지식인이었던 '리오 휴버먼(1903~1968)'이 쓴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는 중세의 유럽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무런 변화 없이 천년 내내 흐린 날만 계속되었을 것 같은 그 시기에도 변화의 기미는 조금씩 조금씩 나타났다. 천년 간 굳건했던 봉건제에 미묘한 균열의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농사만 짓던 시대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거래란 걸 하기 시작했고 상거래는 조금씩 조금씩 증가했다. 하지만 단지 미약한 변화일 뿐이었다. 휴버먼은 왜 이런 것까지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걸까. 그때까지도 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이 지금 자본주의의 시작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대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교양 과목으로 경제학을 선택한 적이 있지 않을까. 똘망똘망한 눈으로 대학 교정을 걷던 나 역시 교양 과목으로 경제학을 선택한 적이 있다. 이 불안하고 험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돈을 잘 벌기 위해서도 경제학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과목이라고 생각했다. 생산과 소비가 만나고 효용이 한계와 만나는 등 수업시간 내내 칠판에 그려진 그래프를 공책에 따라 그리던 생각이 난다. 무슨 놈의 그래프가 그리도 많았는지. 두꺼운 교재에는 경제 이론을 뒷받침하는 실례도 많이 실려있었지만 그것에 재미를 느끼기 보다는 외울게 더 늘었다는 시험과 평가에 대한 부담감을 더 크게 느꼈던 것 같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에는 그래프가 나오지 않는다. 경제학 교재처럼 경제 이론에서 시작해서 실례로 들어가지도 않는다. 물론 그 역도 아니다. 단지 중세 시대부터 대공황과 파시즘이 등장한 1930년대까지(이 책은 1936년에 씌어졌다), 농노제에서 자본주의로 경제가 어떻게 변했으며, 자본주의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이론이 아니라 그 당시 생활상을 통해서 이야기해 주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라는 제목만 봐서는 무척 어렵고 딱딱할 것 같지만 책의 내용은 그런 우려와는 정 반대다. 왠만한 장르소설보다 더 흡인력이 강해서 책을 한 번 들면 쉽게 내려놓을 수 조차 없다. 하지만 어디 재미뿐이던가. 정신 없이 읽고 있으면 파란만장한 자본주의씨의 일대기가 머릿 속에 촤르르 펼쳐지는 것만 같다. 

재밌게 몰입해서 읽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마음이 무거워지곤 하는 때가 있었다. 잔뜩 낀 구름 너머 해가 떠 있긴 한건지 의심스러운 것처럼 역사가 과연 진보하는게 맞긴 한건지 의구심이 들곤 했다. 중세 시대에 토지를 소유한 소수의 귀족과 그에 착취를 당하는 다수의 농민, 농노가 나뉘어 있던 것처럼 근대에도 이와 조금도 다름없이 자본을 소유한 소수의 자본가와 그에 착취를 당하는 다수의 노동자가 나뉘어 있다는 사실. 혁명이란 것이 실은 지주와 귀족이 쥐고 있던 특권을 브루조아와 자본가가 차지한 사건일 뿐이라는 섬뜩한 사실에 눈 앞이 아득해지곤 했던 것이다. 과거엔 눈에 빤히 보이는 노예제라는 굴레가 사람들을 억압했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지만 너무도 강력한 돈과 욕망이라는 굴레에 스스로 갇힌 사람들을 보노라면 모골이 송연해지곤 하는 것이었다.

단지 자본과 욕망은 자기 증식에 열중했을 뿐인데 주위의 모든 게 변해버린 것이다. 이 보다 더 큰 동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 거대한 자본주의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그래서 자본의 자기 증식을 멈출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힘 말이다. 타인과의 동등한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의 힘이 과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힘보다 커질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생각해 보면 자본의 자기 증식이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만 같고, 평등을 바라고 타인과 연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부자연스런 것만 같다. 번식을 위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유전자에 기록된 본능적인 행동이 아닐까. 평등한 세상을 꿈꾸고 그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어쩌면 유전자의 기억을 거스르는 인간의 지난한 노력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시대를 맞기 위해 인류는 중세의 어둠 속에서 또 다시 천년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


그림 출처: http://image.yes24.com/momo/TopCate09/MidCate06/853971.jpg

by cuspymd | 2009/09/08 02:41 | | 트랙백 | 덧글(3)

못생긴 그녀와 사랑에 빠지다


17세기 중반 스페인 마드리드에 펠리페 4세'라는 왕이 살고 있었다. 그의 궁전에는 디에고 벨라스케스'라는 궁정화가가 있었는데 이 벨라스케스'라는 궁정화가는 1656년 높이만도 3미터가 넘는 거대한 그림을 완성한다. 그림의 제목은 [라스 메니나스]. 워낙 유명한 그림인지라 미술에 문외한이라 해도 다들 한 번씩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라스 메니나스]라는 그림은 작품성도 작품성이지만 시점과 구도의 독특함으로 인해 자주 이야기되곤 한다. 이 거대한 그림 속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부터 그림 중앙에 빛을 받고 서 있는 깜찍한 마르가리타 공주, 그리고 공주를 둘러싼 여러 시녀들.

[라스 메니나스]에서 화가는 그림을 그리던 중에 몸을 옆으로 빼고 모델을 뚫어지게 관찰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가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관찰자인 나를 말이다. 내가 그림의 모델일리 없을텐데 그는 왜 나를 보고 있는 걸까. 그러고보니 화면 중앙의 마르가리타 공주와 여러 시녀들도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와 그녀들은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궁금증은 그림의 원경에 놓인 거울을 통해서 밝혀진다. 거울 속에는 희미하게 두 남녀의 모습이 비치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그림 속 화가가 그리고 있는 펠리페 4세 왕과 왕비이다. 어랏, 거울을 통해 가늠해 보니 저들이 서 있는 위치가 지금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딱 내 위치 아닌가. 모델의 시선과 감상자의 시선이 일치한다는 역설과도 같은 묘한 상황. 바로 이게 [라스 메니나스]가 재밌는 이유다.

이외에도 [라스 메니나스]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하지만 여태 어느 누구도 그녀를 주목한 적은 없었다. 화면의 오른쪽 구석 무표정한 표정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는 투박한 얼굴의 여자. 사실 얼굴만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할 수 조차 없다. 단지 머리가 길고 치마를 입고 있으니 여자라고 단정하는 정도. 머리가 큰데도 불구하고 옆의 나이 어린 시녀들보다 키가 작은 것으로 봐서 영락없는 난쟁이이다. 사람들은 어릿광대라고 했다. 무료한 궁정 생활에서 재주를 부리고 웃음을 주는 어릿광대.

박민규의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앞 표지는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선 오른쪽의 난쟁이 여자를 제외한 모든 것이 실루엣 처리되어 원경으로 한 발짝 물러나 있다. 그리고 여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난쟁이이자 광대인 그녀에게 시선을 모으도록 한다. 대체 왜 이 소설은 우리에게 보잘 것 없는 그녀를 주목하도록 하고 있는걸까.

     
여자들은 흔히 그런다. 남자들은 이쁜 여자만을 밝힌다고. 세상의 어느 남자가 이 말을 부정할 수 있을까. 친구가 소개팅을 했거나 여의사에게 진찰을 받았거나 심지어 여자 깡패에게 두들겨 맞았더래도 어김없이 남자들은 묻는다. "이뻐?" 라고. 이쁜 여자들은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되고, 못생긴 여자들은 아무리 이쁜 짓을 해도 용서가 안되는 것이 남자들의 절대진리. 소녀시대 화면 보호기를 얻지 못해 쩔쩔매는 남자, 카라의 엉덩이춤에 침을 흘리는 남자, 오이를 못 먹는 제시카를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는 남자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여자가 보잘 것 없고 못생긴 외모를 가졌다는 것은 단지 남자들의 사랑을 못 받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추한 외모는 그 자체로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뒤돌아 보는 시선들, 수근거리다 킥킥대는 웃음소리. 그것들은 추한 그녀들의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다. 세월이 흘러 왕과 왕비가 사라지고 궁전은 박물관으로 변하고 자동차가 도로 위를 달리며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세상이 도래했지만 그녀들의 삶은 여전히 어릿광대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초등학교 때 아주 유명했던 여자애가 있었다. 나와 같은 학년이었던 이 아이에겐 한 학년 위인 언니가 있었는데 언니 역시 그녀와 판박이였다. 이 두 자매는 못생긴데다 더럽기까지 했다. 언제 씼었는지 얼굴엔 검은 때가 가득했고 옷은 더러웠다. 머리는 항상 수세미처럼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그녀들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모두 그랬다. 그들은 대체 얼마나 가난했던 걸까. 그런데도 자식은 주렁주렁 낳아서 그녀들의 동생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들과 나는 그 가족의 계보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며 놀곤 했다. 그녀들에 관해 농담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주요 놀이 중 하나였다.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는데도 그래서 한 번도 얘기를 해본 적이 없는데도 그녀들은 우리의 장난감이 되어야 했다.

회사에서 사람들과 주고 받는 농담도 서로의 외모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얼굴의 주름에 관한 농담, 튀어나온 배에 관한 농담, 여성의 화장에 대한 농담, 게다가 나와 다르게 생긴 외국인에 대한 농담까지. 뛰어난 미모는 금새 선망의 대상이 되고 그에 벗어난 것은 외면받고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외모적인 것이 아니면 농담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처음 본 여자들이 호감을 품을 정도로 근사한 외모를 가진 남자이다. 그런 그가, 세상 남부러울게 없을 것 같은 그가 못생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대체 왜? 세상 남자들 모두 입을 벌리고 의아해할 것이다. 에이, 변태겠지 단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변태가 아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는 비로소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잘 생긴 그와 못 생긴 그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박민규가 이런 소설을 쓰리라곤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무규칙이종소설가 박민규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써내리라곤 결코 상상조차 못했다. 소설의 초반부를 읽으면서도 긴가민가 했다. 이것이 정말 박민규가 낳은 것인지를. 저렇게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쓴 인간이 이런 서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그와 그녀가 만나는 장면부터 소설이 시작되는데 문장이 계속되고 책장이 여러 장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길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몇 발자국 채 걷지도 않은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와 그녀는 되도록 천천히 길을 걸었고 박민규의 문장이 이들의 느린 걸음에 보조를 맞추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것이 박민규가 그와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만들어낸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도 이내 그들의 걸음에 보조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여러모로 영화가 생각나게 하는 소설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사진 엽서 몇장과 BGM 4곡이 들어있는 음악 CD가 동봉되어 있다. 소설에 BGM 이라니.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나 싶다. 음악을 들으며 그와 그녀가 걷던 거리를 같이 걸어본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는 Writer's cut 이라는 게 들어가 있다. 영화로 치자면 Directer's cut 에 해당하는 것일테다. 소설의 결말과 다른 또 하나의 결말. 처음엔 뜬금없이 이게 왜 나오나 싶었다. 하지만 읽고 나서는 마음에 든다. [라스 메니나스]의 그림 속 그림처럼 소설 속 소설이라는 역설적인 묘한 상황. 바로 이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더 재밌게 느껴지는 이유다.

수 년전 어느 날 박민규는 부인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내가 만약 못생겼다고 한다면 그래도 저를 사랑해 주실 건가요?". 박민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이 소설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소설을 재밌게 읽고 내려놓은 지금에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가슴 설레며 웃고 있는 지금에도 질문은 여전히 무거운 여운을 남긴다.

"당신은 못생긴 그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나요?"

 

그림 출처: http://www.easyum.co.kr/images/arttalk/0424_14_1.jpg
그림 출처: http://image.yes24.com/momo/TopCate75/MidCate01/7403846.jpg

by cuspymd | 2009/09/06 01:40 | | 트랙백 | 덧글(9)

100'C - 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

그렇다.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 부글부글. 홀로 라면을 끓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냄비에 적당량의 물을 붙고 가스렌지 위에 올린 다음 불을 켠다. 처음엔 아무런 미동도 없지만 기다려 보라. 이내 기포가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하고 달궈진 냄비가 쉬이하고 천천히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어느 세월에 끓는데' 하면서 책이나 볼까하고 책을 펴고 한 두 글자 읽기 시작하는 찰나, 어느새 냄비 속 물은 펄펄 끓고 있는 것이다. 에그머니. 호들갑스럽게 뛰어가 뜨거운 냄비 뚜껑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수증기, 그 속에서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끓어오르는 물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는 것을.

77년생 만화가 최규석은 그림도 잘 그리는데다가 얼굴도 참 잘 생겼다. 튀어나온 광대뼈와 선 굵은 이목구미. 옛 어르신들이 본다면 "그놈 참 남자답게 잘 생겼다~." 라고들 하시지 않을까. 간혹 '소도둑놈' 이라 부르는 어르신도 계시겠지만 말이다. 그는 내가 아는 만화가 중에 가장 젊고 가장 잘 생긴 만화가이다. 하지만 그의 가장 뛰어난 매력은 역시나 그가 그린 만화이다. 그리고 지금 내 눈 앞에 100도씨의 온도로 뜨겁게 끓어오르는 그의 만화가 있다.

그래도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책의 어딘가엔 반드시 경고문을 넣었어야 했다. 공간이 모자라 넣을 자리가 없었다고 한다면 하다못해 '띠지'에라도 경고문을 넣었어야 했다. 사소한 부주의가 예상치 못한 큰 사고를 나을 수도 있는 법. 고등학교를 나온 누구라도 '카오스 이론'이란 것을 알고 있지 않나. 믿거나 말거나, 나비의 날갯짓 하나가 태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 이 만화 독자들의 안전을 위해 엄중한 경고문을 넣는다. 잊지마시라,

"화상 주의~!!"

처음 이 만화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정확히 꼬집을 수는 없지만 몇 년 전 어느 기사를 통해서였다. 100도씨라는 제목으로 6월 민주항쟁을 다룬다고 했다. 씨디 형태로 각 중고등학교에 보급된다고도 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울컥했지만 다시 중고등학교로 돌아가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어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언젠가 인연이 닿는다면...' 하고 스스로를 달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고 이내 사사로운 일상을 정신없이 지내온 듯 하다. 그리고 어느날 들려온 반가운 소식. 100도씨가 드디어 단행본으로 발간된 것이다.

77년생의 최규석에게 87년 6월 항쟁이란 그가 실제로 겪은 사건이 아니다. 그도 나처럼 87년에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른채 자랐고, 머리가 굵어진 후에는 '아 그런 사건이 있었구나' 라고 덤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았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로부터 작품의 제안이 들어왔다고 한다. 처음엔 물론 거절했을 것이다. 누구라도 쉽게 뛰어들 수 없는 주제가 아닌가. 그런대도 그가 이 어려운 작업을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이 이야기의 대상이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청소년기를 지난지 이미 오래지만 87년 6월의 뜨거운 기억을, 좋아하는 작가의 만화로 접할 수 있다는 것에,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걸맞게 뜨거운 만화를 그려준 만화가 최규석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러고 보니 만화 뒷 표지에서 박재동 화백이 만화가 최규석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박재동 화백에 이어 두 번째로 만화가 최규석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바이다.

[에필로그]

대학생 영호는 데모하다 감옥에 잡혀 들어간다. 선배 박종철의 죽음을 접한 그는 "박종철을 살려내라" 내의에 피로 쓴 글씨로 옥내 시위도 해 보지만 너무나 쉽게 제압당하고 만다. 딱 제 몸만한 좁은 독방 갇힌 영호에게 세상은 너무 큰 벽처럼 느껴졌다. 너무 크고 육중해서 도저히 흔들릴 것 같지가 않아 두려웠다. 두려워 흔들리는 그에게 옆방 사람이 말을 한다.

"사람은 온도를 잴 수가 없어. 하지만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영호는 묻는다.

"그렇다 해도 두려움은 남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수십년을 버텨내셨습니까?"

옆방 사람은 웃으며 답한다.

"나라고 왜 흔들리지 않겠나. 다만 그럴 때마다 지금이 99도다... 그렇게 믿어야지. 99도에서 그만두면 너무 아깝잖아."

[뜨거운 여름이 가고 선선한 가을이 왔지만 사람들의 온도는 여전히 99도라 믿는다.]



그림출처: http://image.aladdin.co.kr/cover/cover/893647166x_1.jpg

by cuspymd | 2009/09/03 01:02 | 만화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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