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범시민이란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아내와 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클라이드란 사내. 어느 날 괴한 두 명이 집에 침입하고 이들은 아내와 딸을 겁탈한 후 살해한다. 운좋게 클라이드는 살아남았고 범인 2명도 잡힌다. 하지만 범인들이 증거를 인멸했던 것일까 범인들의 살인죄를 인정할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현장에 있던 클라이드가 유일한 목격자이지만 결정적 살인장면을 보지 못하고 기절했기 때문에 그의 증언 역시 법적 증거로서의 효력이 없다.
이대로 재판이 진행된다면 범인 둘 중 누구에게도 살인죄가 성립될 확률이 희박하다. 이 사건을 맡은 유망한 검사보 닉은 범인 한 명과 협상을 하기로 한다. 빌어먹을 범인과 무슨 협상이냐고? 쟤가 했다고 니가 불면 쟤한테 독박 씌우고 너는 감형해 주겠다는 달콤 쌉싸롬한 협상. 하지만 이를 어쩌랴. 검사 닉이 구제한 범인 녀석이 바로 자신의 아내와 딸을 겁탈하고 살해한 망나니라는 것을 알고 클라이드는 경악한다. 제발 협상을 하지 말라고 울부짖는 클라이드.
검사 닉은 어차피 협상을 하지 않으면 둘 중 아무도 살인죄를 받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니 한 놈에게라도 뒤집어 씌우는게 낫지 않냐고 항변한다. 그래, 완전히 허튼 소리는 아니잖아? 어차피 둘 다 빠져나갈 거라면 한 놈에 몰빵하는게 낫지 않냐 이거지. 하지만 눈 앞에서 그 망나니 놈이 자신의 아내와 딸을 추행하는 것을 지켜보며 오열해야 했던 클라이드에겐 씨도 안 먹힐 소리다. 협상은 성사되었고 재판이 끝난 후 운이 좋은 망나니 범인 녀석은 능글거리는 웃음 지으며 검사 닉에게 악수를 청한다.
그리고는 뜬근없이 10년 후. 10년이 지났는데도 주인공들은 전혀 늙지 않았다. 하다 못해 머리 모양이라도 달라져야 하는 거 아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이들은 10초 후가 무색할 정도로 이전 SCENE 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허나, 얼굴은 그대로지만 그들에게 어찌 10년이 짧은 세월이었겠는가.
검사 닉은 아내와 행복한 가정 생활을 이루고 있고 그의 딸은 어느덧 10살의 꼬마 아가씨로 자랐다. 이 꼬마 아가씨의 키가 10년 전 사건 당시 클라이드 딸의 키하고 비슷한 것도 같다. 무언가 어두운 기운이 느껴지는가? 그리고 클라이드. 생긴 것 답지 않은 천재적인 머리로 10년간의 치밀한 준비를 마치고 썪어빠진 사법체계를 응징하기 위해 우리의 히어로 클라이드가 등장했다. 그가 어떻게 허술한 사법체계를 조롱하고 괴멸시키는 모두들 기대하시라.
영화가 끝난 후 사람들의 반응
영화를 보고난 사람들은 대개 결말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전반적으로 재미있었지만 끝부분이 좀 밋밋했다는 반응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클라이드는 시청건물의 회의실에 폭탄을 설치한다. 회의실에 모인 시청 고위직들을 모두 날려버릴 속셈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검사 닉에 의해 저지 당하고 만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쉬움을 느끼는 것 같다. 클라이드는 자주 검사 닉을 앞에 두고 모두를 죽일거라고, 모든 걸 날려버릴 거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곤 했다. 이 가공할 천재 사내가 저렇게 호언장담을 하니 관객들은 모두 인류의 절반 정도가 몰살당하는 엄청난 테러를 상상했는지도 모른다. 허지만 뻥쟁이 클라이드는 고작 시청 회의실 하나 폭파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또 하나의 불만점은 천재라는 설레발이 무색해질 정도로 클라이드의 원대한 계획의 비밀이 너무 쉽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 망나니 범인 녀석을 처리한 클라이드는 순순히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갇히고 만다. 허나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살인이 그가 말한대로 이루어진다. 아뿔싸, 그는 천재가 아닌 초능력자였단 말인가. 순식간에 그는 신의 권좌에 오른다. 신은 거드름을 피우며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모든 행동은 이미 예측되었다. 너희들의 생과 사는 나의 손가락 하나에 달려있다. 오, 신의 권능.
그렇다. 관객들은 모든게 가능하다 믿었을 것이다. 신의 하품에 의해 인류의 몰살도 가능할 것만 같았다. 허나 그 눈부신 신의 권능은 너무도 허무하게 벗겨지고 만다. 클라이드가 초능력자가 아니라 덜떨어진 천재에 불과했음이 너무 쉽게 들어나고 만다. 눈 먼 복수심이 그 차갑던 이성을 너무 높은 온도로 데워버렸는지도 모른다. 신의 권능이 고작 부동산 기록이 담긴 이메일 한 통에 의해 무너져내릴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과연 신의 권좌는 모래로 만들어진 것이었던가.
클라이드는 대체 왜?
복수를 꿈꾼 클라이드. 헌데 그의 행동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그가 복수심에 눈이 뒤집히도록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가장 직접적인 사람을 꼽자면 그의 집에 침입한 두 범인이다. 그리고 그들은 클라이드에 의해 고통스런 최후를 맞이한다. 자, 이제 복수는 끊난걸까. 아니, 생각해 보니 한 사람이 더 남아있다. 검사인 주제에 망나니 녀석과 협상을 맺은 닉. 법원 앞에서 망나니 녀석과 악수를 나누었던 검사 닉. 그가 바로 처절한 복수의 다음 표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허나 클라이드는 검사 닉을 향해 곧바로 나아가지 않는다. 대신, 썩어빠진 사법체계에 복수의 칼날을 겨눈다. 검사 닉은 털 끝 하나 다치지 않는 대신 닉의 주변 동료들이 하나 둘 제거되기 시작한다. 뭐, 뭐야. 이거 좀 황당하지 않나. 왜 닉은 가만두고 애꿎은 주변인들만 죽여대고 있는건가. 클라이드와 닉의 대화에 다시 한 번 주목해 보자.
왜 범인과 협상을 했느냐고 다그치는 클라이드. 검사 닉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범인 두 놈 다 살인죄를 벗어났을 거라고 말하면서 그걸 니가 참아낼 수 있었겠냐고 되묻는다. 협상을 하지 않았다면 최선을 다해 재판에 임했을 거고 그런데도 범인들이 살인죄를 받지 않았다면 그 결과를 어쩔 수 없지만 감내했을 거라고 클라이드는 울먹이며 대답한다.
보라. 클라이드는 사법체계에 한계가 있지만 그것을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로 미루어 그가 사법체계 전체가 아니라 범인과 협상을 가능하게 하는 일부 사법 조항과 그 조항을 적극 활용한 검사 닉에게 분노를 느낀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헌데 왜 클라이드는 닉에게 총구를 직접 겨누지 않고 사법체계와 공권력 그 자체를 적으로 돌린 것일까. 물론 극 중에는 협상을 맺은 것을 뼈저리도록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클라이드가 닉에게 말하는 대목이 있지만, 그가 닉에게 손 대지 않는 이유로는 그다지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클라이드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복수를 꿈꾸었다면 그의 복수는 검사 닉을 똑바로 향했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클라이드는 자신이 느낀 고통을 되갚으려는듯 두 범인이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가도록 손을 쓴다. 이처럼 그는 닉에게도 자신이 받은 고통을 똑같이 되돌려줬어야 했다. 행복한 삶을 살고있는 검사 닉의 집에 두 명의 괴한을 침입시켜 닉의 아내와 딸을 겁탈한 후 죽이고, 결정적 증거를 인멸시킨 후 경찰에 잡히도록 해야했다. 그리고는 이 사건을 두고 검사 닉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 좀더 솔직한 복수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이태원 살인사건
한정된 공간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두 명의 용의자가 있다. 두 명의 용의자 중 한 명이 살인을 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허나 둘 중 누가 범인지를 증명할 수가 없다.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얼마 전에 봤던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은 이 상황 자체의 아이러니를 이야기의 중심에 가져다 놓는다.
좁다란 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체포된 두 명의 용의자. 결정적 증거의 부족. 두 용의자는 서로 상대방이 범인이라고 우겨댄다. 과연 둘 중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둘 중 하나가 범인이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지만 누가 범인인지를 집어낼 수가 없다. 아, 가슴이 미어터질듯한 답답함. 용의자들을 쥐어 패서라도 실토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둘에게 사이좋게 형량의 1/2씩을 선고할 것인가.
모범시민도 이 경우와 다르지 않다.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망나니를 살인자라고 말하지만 영화에선 망나니가 클라이드의 아내와 딸의 숨통을 끊는 결정적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단지 정황으로 봐서 망나니가 범인이 틀림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클라이드는 온 몸이 꽁꽁 묶여 바닥에 뉘어져 있었기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어 있었고 그 마저도 아내와 딸이 죽기 전에 기절해 버렸다. 관객들은 클라이드와 함께 사건의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망나니가 범인이라는 클라이드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허나 극 중 클라이드 이외의 인물들은 사건현장의 물증과 범인, 목격자의 진술 만으로 사건에 대해 판단해야만 한다. 만약 관객에게 사건 현장의 SCENE 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 때에도 관객들은 클라이드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까. 그 때에도 관객들은 클라이드의 분노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을까. 옳고 그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옳고 그름을 밝혀내는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더욱 신중해야만 한다.
신중치 못했던 클라이드. 그래서 그렇게 쉽게 꼬리를 밟히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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