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 앞 새앙쥐 제리

'톰과 제리'라는 만화영화를 설마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톰과 제리'에서 고양이 톰은 생쥐 제리를 골탕 먹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지만 머리 좋은 제리에게 항상 당하기만 한다. 제리는 처음엔 궁지에 몰리다가 기지를 이용해 상황을 역전시키고 끝에 가선 오히려 톰을 가지고 논다. '톰과 제리'는 어린이 만화지만 상당히 잔인하다. 10톤 망치로 내려치고, 총으로 쏴대고, 심지어 폭탄으로 폭파시킬 때도 있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머리가 굵어진 후에 봤을 때는 '이렇게 잔인했었나?' 하며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제리에게 처참하게 당하는 톰을 볼때마다 불쌍한 톰을 동정하게 되고, 어느새 내가 톰을 응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도 있다. 그래서 제리보다 톰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믿기 힘들겠지만 오늘, 나는 '제리'가 되었다. 하지만 '톰과 제리'에 나오는 앙증맞으면서 귀엽고 한편으로는 영악한 '제리'가 아니라 단지 작고 왜소하기만한 새앙쥐 '제리'다. 의자에 앉아 키보드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몸이 간질간질 하더니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방이 커지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몸이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엔 새앙쥐 '제리'만큼 줄어들어 버렸다. 간신히 책상을 타고 올라와 온 몸으로 키보드를 치고 있다. 세상에 키보드는 이렇게나 거대했던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니 내 방이 마치 세상처럼 거대한 것 같아 아찔해진다. 단지 방 안을 한 번 둘러보았을 뿐인데 머리가 핑 도는 듯한 멀미. 아, 어지러워~.

벌레가 되어 버린 그레고리 잠자(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처럼 나도 새앙쥐 제리가 되어 버렸다. 다리가 여러 개 달린 끔찍한 벌레가 아닌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하지만 잠자는 죽었다. 그것도 불쌍한 톰처럼 처참하게. 나도 죽게 되는 걸까. 갑자기 불안해진다. 이 커다란 방을 둘러보는 것만도 힘겨운데 바깥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기지를 발휘해 톰을 응징하는 제리처럼 나도 이 거대한 세상을 유유히 헤쳐나갈 수 있을까.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깜깜한 밤. 그래서 항상 깜깜한 밤에 대해서 쓰곤 한다. 고개를 돌리면 창 밖의 어둠. 그거 외엔 마땅히 쓸게 없으니까. 온 몸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다 지친 제리. 숨을 헐떡이며 검은 창 밖을 바라본다. 제리의 긴 꼬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축 쳐져있는 것만 같다.

by cuspymd | 2009/10/08 01:21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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