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와 너무도 다른 지금을 산다

소설가 '현기영' 하면 누구나 제주도를 떠올릴 것이다. 그의 소설 속 제주의 풍경은 한없이 아름답기만 한데 특이하게도 그 아름다움은 아이를 품은 어머니처럼 사람들의 슬픔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아름다운 섬에서 일어난 끔찍한 비극 '제주 4.3사건'. 소설가 '현기영'은 결코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이 사건의 아픈 기억을 그의 소설 속에 날 것 그대로 풀어놓곤 했다. 그의 장편 '지상의 숟가락 하나'가 그랬고 소설집 '순이삼촌' 또한 그랬다. 꼭 4.3사건이 아니더라도 그의 소설 속엔 항상 제주가 등장했다. 제주가 배경인지 아니면 제주 자체가 소설 속 주체인지 헷갈릴 정도로 제주는 그의 소설 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현기영의 새 장편 소설 [누란]에는 제주도가 등장하지 않는다. 

서울 남산 소파길의 동쪽 끝에는 '서울특별시 균형발전본부'라는 건물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이 건물은 안기부 '6국'이라 불렸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에게 두려움 자체였던 그곳. 학원 사찰과 수사를 담당했다고 한다. 때는 80년대의 어느 날. 대학생 '허무성'이 형사들에게 이끌려 잡혀온 곳이 악명높은 남산 기슭의 한 지하실이라고 하니 아마도 안기부 '6국'의 지하 조사실이었을 게다. 소설 [누란]은 '허무성'이라는 한 젊은 지식인의 기구한 삶의 전말에 관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야기는 '허무성'이 지하실에 잡혀들어 오면서 시작된다.

체포된 첫날부터 불문곡직 매질이 시작됐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몽둥이 찜질로 자신도 모르게 똥을 싸고 만 '허무성'. 문득 어렸을 때 보았던 개를 잡는 장면이 떠오른다. 목에 밧줄을 걸어 개를 전봇대에 매달은 다음, 몽둥이로 사정없이 후려치던 어른들. 개는 혼비백산하여 발을 허우적거리면서 똥을 싸질렀다. 제 의지로 그런게 아니니 똥을 쌌다는 말보다는 똥을 흘렸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허무성'도 그렇게 전봇대에 매달린 개처럼 혼비백산하여 똥을 흘렸을 게다. 이튿날은 물고문이 시작됐다. 물고문은 그의 남은 인격마저 남김없이 부숴버리고 만다. 허무성은 반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동료들의 이름을 말하게 된다. 지하실에 끌려온 지 하루 반. 남은 것이라곤 부서지고 찌그러진 영혼과 배신자라는 낙인.    

고문을 하던 그들 속에 검은 색 정장을 입은 '김일강'이 있었다. 악마처럼 무자비하던 그는 허무성이 자백을 하고 나자 놀랍게도 친형처럼 살갑게 돌변한다. "어때, 죄다 불고 나니까 시원하지? 그래, 울어야지.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질 거야." 다정한 말투와 함께 건네는 담배 한 개피. '김일강'은 지금까지 너를 눈여겨 봐왔다고, 니가 아주 맘에 들었다고, 앞으로 너의 뒤를 봐주겠다는 말로 '허무성'을 회유한다. '허무성'에게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 그에게는 이미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버렸고 그의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이마저도 배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외면하고 만다. 그후 '허무성'은 '김일강'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역시 '김일강'의 연줄로 대학 교수가 된다.  

그는 행복했을까. 남산의 지하실에 보낸 하루 반의 시간과 '김일강'에 대한 기억은 그의 삶 내내 따라다니며,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허무성'은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 지하실 안의 '김일강'은 그를 끝내 놓아주지 않는다. 소설의 대부분은 대학교수 '허무성'이 현재를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80년대라는 정신적 외상을 가진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90년대와 현재를 말하고 있는듯 보인다. 세계화와 신자본주의라는 물결로 인해 너무나도 변해버린 세상. 소설 속, 대학교수 '허무성'과 학생들사이의 대화는 이러한 변화의 극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진지함이 웃음거리가 되는 사회. 학생들은 매사 진지하고 부정적인 '허' 교수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너무나 자유로운 이 시대에 '허무성'은 더이상 배신자가 아니다. 무엇에 대한 배신이었을까. 사람들은 그런 것 따위에는 이미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 걸 생각하기엔 세상은 재미난 것들로 가득차 있고, 행복하게 살기에도 바쁜 사람들에게 그런 걸 생각할 겨를 따윈 없는지도 모른다. 국회의원이 된 '김일강'. 그의 머릿 속은 오로지 두 가지 것으로만 꽉차 있는 듯하다. 박정희와 파시즘. 그는 이 둘의 맹목적인 추종자이다. 아, 그리고 또 하나. 그들 세력을 하나로 결집시켜주는 '교회' 라는 이름의 신성한 장소. '김일강'은 '허무성'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허무성'에게 끊임없이 접근한다. 그는 결코 '허무성'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 '허무성'을 삼켜버리고 말 것이다. 

이처럼 꽉 막힌듯 보이는 현실에서 '허무성'은 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김일강'의 무자비한 손아귀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초라하게만 보이는 주인공이지만 그가 자신의 과거를 이겨내고 그만의 길을 갈 수 있기를 응원해 본다.


이미지 출처: http://image.yes24.com/goods/3498248/L    

by cuspymd | 2009/10/01 01:09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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