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9월 23일
관계에 대하여
이웃 블로거 나스타님께서 며칠 전 오토바이 사고를 목격하신 듯 하다. 오토바이를 타고 있던 청년은 도로에 널브러졌고 나스타님이 보는 앞에서 죽어갔다고 한다. 청년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도한 나스타님은 심적으로 큰 충격을 받으신 것 같다. 글을 읽으면서 나는 청년의 죽음을 애도했지만 그 죽음이 나에게 큰 울림을 주지는 않았다. 마치 신문의 사고 사례란을 보는 것처럼 덤덤했다. 오늘의 교통사고 몇 건, 사망 몇 건, 부상 몇 건.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면 달랐을까. 아마 내가 그 사고 현장에 있었더라도 신문 속 오늘의 사망자 수를 읽는 것처럼 무료하게 청년의 죽음을 읽어내지 않았을까.
대학생 때니까 그리 오래 전 일은 아니다. 그 때는 내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의 중간 상태. 내 자신이 딱 그 중간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좀비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좀비와는 성질이 정반대라 봐야한다. 좀비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긴 하지만, 하여 피부는 썩어가고 여기저기 살점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지만 특이하게도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잠도 안 자고 지치지도 않고 오로지 맹렬히, 그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산 자의 피를 끊임없이 갈구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생명력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그 어떤 것도 욕망하지 않았다. 아무런 이유나 의도 없이 단지 어제를 살던 습관으로 오늘을 살아가곤 했다. 습관으로 지탱되는 삶. 그것은 꼭 살아있는 거라기엔 너무 가볍고, 죽어있는 거라기엔 너무 무거운 듯 했다.
그 때는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살아있는 게 무엇이라 생각했길래 자신이 살아있지 않다라고 느꼈던 걸까. 그때의 삶에서 빠져있던 그 무언가가, 살아있다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때보단 더 나이를 먹은 지금. 그 시절 빠져있던 것의 정체가 혹시 우리가 '관계'라 부르는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관계. 타인과의 관계. 아니 꼭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나 아닌 다른 무엇과의 관계. 그 관계가 있을 때야 비로소 살아있는 것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은 든다.

며칠 전에 [타인의 삶]이란 영화를 봤다. 구 동독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정보국에서 일하는 한 사내가 어느 예술가 부부를 감청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한 평생 국가를 위해서 일해온 이 늙은 사내는 감정이란 게 있기는 한 것인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메마르고 건조하기만 하다. 그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감시하고 감청하고 또 신문하는 일이다. 이런 일을 평생 해온 사람에게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더 신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늙은 사내는 그저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다. 한 눈 파는 일 없이 오로지 감청, 감시, 신문에만 몰두하니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무서운 사내의 감청 대상이 되어버린 예술가 부부. '독 안에 든 쥐'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닐까.
그렇다. 꼭 '독 안에 든 쥐' 였다. 결코 빠져나갈 수 없었다. 늙은 사내가 변하지 않았다면 그들 예술가 부부는 늙은 사내의 손아귀에서 결코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이 늙은 사내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알던 사내가 그들 부부의 삶에 관계하기 시작했다. 대체 왜 감청의 프로페셔널인 그 늙은 사내는 그들 부부의 삶에 관계하려 했던 걸까.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과 삶의 토대가 무너질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왜 그들 부부의 삶에 끼어 들어 그들을 지켜주고자 했던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대학교 때의 내가 느꼈던 것처럼 아마 그 늙은 사내도 자기 자신이 살아있지 않다라고 느낀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늙은 사내는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끼여 그저 습관처럼 타인을 감시하는 자신의 삶에서 살이 썩어가는 듯한 부패의 냄새를 맡은 것인지도 모른다. 식어있는 자신의 삶에 따듯한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사내는 타인과의 관계를 희망한 것은 아니었는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감동을 더 크게 느끼고 싶으신 분은 이후의 글을 읽지 말아주세요.) 시간이 흐른 후 통일된 독일의 어느 화려한 극장. 늙은 사내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작가의 연극이 성공리에 공연되고 있다. 우연한 대화를 통해서 작가는 동독 시절 자신의 아파트가 감청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순간 작가는 의아해 한다. 자신의 아파트가 감청되고 있었다면 분명 자신은 무사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에. 작가는 정보부의 옛 문서를 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로소 작가는 그들의 삶에 관계했던 늙은 사내의 존재를 알게 된다. 암호명 "HGW XX/7". 작가는 바로 늙은 사내를 찾으러 달려가지만 무슨 맘을 먹었는지 늙은 사내의 코 앞에서 차를 돌리고 만다.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난 어느날. 늙은 사내는 감시가 아닌 평범한 일을 묵묵히 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늙은 사내는 우연히 서점 앞을 지나던 중 작가가 새로 낸 책의 포스터를 보게 된다. 책의 제목은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 그냥 무심히 지나칠 수는 없었다. 오래 전 작가가 슬픔에 겨워 연주하던 곡의 제목이었으니까. 감청하던 늙은 사내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던 바로 그 곡이었으니 말이다. 서점 안으로 들어 간 늙은 사내는 책 한 권을 들어 표지를 넘겨 본다. 그리고 비로소 작가가 늙은 사내에게 남긴 메시지를 보게 된다.
이즘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 [러브레터]에도 이와 비슷한 가슴 뭉클해지는 마지막 장면이 있었다. 띵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갑작스레 찾아온 학교 후배들. 다들 무엇이 그리 신이 났는지 추운 겨울 바람에도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그리고 불쑥 내미는 책 한 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뒤에요, 뒤. 아이들이 조바심을 내며 외친다. 마지막 장을 펴고, 독서 카드를 꺼낸다. 그리고 뒤집어 카드의 뒷면을 바라본다. 클로즈 업되는 여주인공의 얼굴.
그들이 책에서 찾은 것은 희미하게 잊어가고 있던 관계의 흔적은 아니었을지. 그 관계의 흔적을 통해 생의 감동을 느끼고, 그 순간 자신이 살아있다라는 사실을 맹렬하게 실감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산다는 건 바로 그런 관계의 실감이고, 그로 인한 가슴의 벅참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 하루다.
이미지 출처: http://image.cine21.com/resize/cine21/poster/2007/0214/M0010007_poster%5BH585-%5D.jpg
대학생 때니까 그리 오래 전 일은 아니다. 그 때는 내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의 중간 상태. 내 자신이 딱 그 중간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좀비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좀비와는 성질이 정반대라 봐야한다. 좀비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긴 하지만, 하여 피부는 썩어가고 여기저기 살점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지만 특이하게도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잠도 안 자고 지치지도 않고 오로지 맹렬히, 그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산 자의 피를 끊임없이 갈구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생명력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그 어떤 것도 욕망하지 않았다. 아무런 이유나 의도 없이 단지 어제를 살던 습관으로 오늘을 살아가곤 했다. 습관으로 지탱되는 삶. 그것은 꼭 살아있는 거라기엔 너무 가볍고, 죽어있는 거라기엔 너무 무거운 듯 했다.
그 때는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살아있는 게 무엇이라 생각했길래 자신이 살아있지 않다라고 느꼈던 걸까. 그때의 삶에서 빠져있던 그 무언가가, 살아있다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때보단 더 나이를 먹은 지금. 그 시절 빠져있던 것의 정체가 혹시 우리가 '관계'라 부르는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관계. 타인과의 관계. 아니 꼭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나 아닌 다른 무엇과의 관계. 그 관계가 있을 때야 비로소 살아있는 것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은 든다.

며칠 전에 [타인의 삶]이란 영화를 봤다. 구 동독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정보국에서 일하는 한 사내가 어느 예술가 부부를 감청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한 평생 국가를 위해서 일해온 이 늙은 사내는 감정이란 게 있기는 한 것인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메마르고 건조하기만 하다. 그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감시하고 감청하고 또 신문하는 일이다. 이런 일을 평생 해온 사람에게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더 신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늙은 사내는 그저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다. 한 눈 파는 일 없이 오로지 감청, 감시, 신문에만 몰두하니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무서운 사내의 감청 대상이 되어버린 예술가 부부. '독 안에 든 쥐'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닐까.
그렇다. 꼭 '독 안에 든 쥐' 였다. 결코 빠져나갈 수 없었다. 늙은 사내가 변하지 않았다면 그들 예술가 부부는 늙은 사내의 손아귀에서 결코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이 늙은 사내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알던 사내가 그들 부부의 삶에 관계하기 시작했다. 대체 왜 감청의 프로페셔널인 그 늙은 사내는 그들 부부의 삶에 관계하려 했던 걸까.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과 삶의 토대가 무너질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왜 그들 부부의 삶에 끼어 들어 그들을 지켜주고자 했던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대학교 때의 내가 느꼈던 것처럼 아마 그 늙은 사내도 자기 자신이 살아있지 않다라고 느낀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늙은 사내는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끼여 그저 습관처럼 타인을 감시하는 자신의 삶에서 살이 썩어가는 듯한 부패의 냄새를 맡은 것인지도 모른다. 식어있는 자신의 삶에 따듯한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사내는 타인과의 관계를 희망한 것은 아니었는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감동을 더 크게 느끼고 싶으신 분은 이후의 글을 읽지 말아주세요.) 시간이 흐른 후 통일된 독일의 어느 화려한 극장. 늙은 사내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작가의 연극이 성공리에 공연되고 있다. 우연한 대화를 통해서 작가는 동독 시절 자신의 아파트가 감청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순간 작가는 의아해 한다. 자신의 아파트가 감청되고 있었다면 분명 자신은 무사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에. 작가는 정보부의 옛 문서를 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로소 작가는 그들의 삶에 관계했던 늙은 사내의 존재를 알게 된다. 암호명 "HGW XX/7". 작가는 바로 늙은 사내를 찾으러 달려가지만 무슨 맘을 먹었는지 늙은 사내의 코 앞에서 차를 돌리고 만다.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난 어느날. 늙은 사내는 감시가 아닌 평범한 일을 묵묵히 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늙은 사내는 우연히 서점 앞을 지나던 중 작가가 새로 낸 책의 포스터를 보게 된다. 책의 제목은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 그냥 무심히 지나칠 수는 없었다. 오래 전 작가가 슬픔에 겨워 연주하던 곡의 제목이었으니까. 감청하던 늙은 사내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던 바로 그 곡이었으니 말이다. 서점 안으로 들어 간 늙은 사내는 책 한 권을 들어 표지를 넘겨 본다. 그리고 비로소 작가가 늙은 사내에게 남긴 메시지를 보게 된다.
이즘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 [러브레터]에도 이와 비슷한 가슴 뭉클해지는 마지막 장면이 있었다. 띵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갑작스레 찾아온 학교 후배들. 다들 무엇이 그리 신이 났는지 추운 겨울 바람에도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그리고 불쑥 내미는 책 한 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뒤에요, 뒤. 아이들이 조바심을 내며 외친다. 마지막 장을 펴고, 독서 카드를 꺼낸다. 그리고 뒤집어 카드의 뒷면을 바라본다. 클로즈 업되는 여주인공의 얼굴.
그들이 책에서 찾은 것은 희미하게 잊어가고 있던 관계의 흔적은 아니었을지. 그 관계의 흔적을 통해 생의 감동을 느끼고, 그 순간 자신이 살아있다라는 사실을 맹렬하게 실감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산다는 건 바로 그런 관계의 실감이고, 그로 인한 가슴의 벅참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 하루다.
이미지 출처: http://image.cine21.com/resize/cine21/poster/2007/0214/M0010007_poster%5BH585-%5D.jpg
# by | 2009/09/23 02:54 | 영화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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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사내가 연극 배우인 부인을 사랑했다는 해석도 있구요,
시인 남편과의 동성애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더라구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