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C - 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

그렇다.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 부글부글. 홀로 라면을 끓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냄비에 적당량의 물을 붙고 가스렌지 위에 올린 다음 불을 켠다. 처음엔 아무런 미동도 없지만 기다려 보라. 이내 기포가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하고 달궈진 냄비가 쉬이하고 천천히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어느 세월에 끓는데' 하면서 책이나 볼까하고 책을 펴고 한 두 글자 읽기 시작하는 찰나, 어느새 냄비 속 물은 펄펄 끓고 있는 것이다. 에그머니. 호들갑스럽게 뛰어가 뜨거운 냄비 뚜껑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수증기, 그 속에서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끓어오르는 물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는 것을.

77년생 만화가 최규석은 그림도 잘 그리는데다가 얼굴도 참 잘 생겼다. 튀어나온 광대뼈와 선 굵은 이목구미. 옛 어르신들이 본다면 "그놈 참 남자답게 잘 생겼다~." 라고들 하시지 않을까. 간혹 '소도둑놈' 이라 부르는 어르신도 계시겠지만 말이다. 그는 내가 아는 만화가 중에 가장 젊고 가장 잘 생긴 만화가이다. 하지만 그의 가장 뛰어난 매력은 역시나 그가 그린 만화이다. 그리고 지금 내 눈 앞에 100도씨의 온도로 뜨겁게 끓어오르는 그의 만화가 있다.

그래도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책의 어딘가엔 반드시 경고문을 넣었어야 했다. 공간이 모자라 넣을 자리가 없었다고 한다면 하다못해 '띠지'에라도 경고문을 넣었어야 했다. 사소한 부주의가 예상치 못한 큰 사고를 나을 수도 있는 법. 고등학교를 나온 누구라도 '카오스 이론'이란 것을 알고 있지 않나. 믿거나 말거나, 나비의 날갯짓 하나가 태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 이 만화 독자들의 안전을 위해 엄중한 경고문을 넣는다. 잊지마시라,

"화상 주의~!!"

처음 이 만화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정확히 꼬집을 수는 없지만 몇 년 전 어느 기사를 통해서였다. 100도씨라는 제목으로 6월 민주항쟁을 다룬다고 했다. 씨디 형태로 각 중고등학교에 보급된다고도 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울컥했지만 다시 중고등학교로 돌아가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어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언젠가 인연이 닿는다면...' 하고 스스로를 달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고 이내 사사로운 일상을 정신없이 지내온 듯 하다. 그리고 어느날 들려온 반가운 소식. 100도씨가 드디어 단행본으로 발간된 것이다.

77년생의 최규석에게 87년 6월 항쟁이란 그가 실제로 겪은 사건이 아니다. 그도 나처럼 87년에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른채 자랐고, 머리가 굵어진 후에는 '아 그런 사건이 있었구나' 라고 덤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았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로부터 작품의 제안이 들어왔다고 한다. 처음엔 물론 거절했을 것이다. 누구라도 쉽게 뛰어들 수 없는 주제가 아닌가. 그런대도 그가 이 어려운 작업을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이 이야기의 대상이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청소년기를 지난지 이미 오래지만 87년 6월의 뜨거운 기억을, 좋아하는 작가의 만화로 접할 수 있다는 것에,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걸맞게 뜨거운 만화를 그려준 만화가 최규석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러고 보니 만화 뒷 표지에서 박재동 화백이 만화가 최규석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박재동 화백에 이어 두 번째로 만화가 최규석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바이다.

[에필로그]

대학생 영호는 데모하다 감옥에 잡혀 들어간다. 선배 박종철의 죽음을 접한 그는 "박종철을 살려내라" 내의에 피로 쓴 글씨로 옥내 시위도 해 보지만 너무나 쉽게 제압당하고 만다. 딱 제 몸만한 좁은 독방 갇힌 영호에게 세상은 너무 큰 벽처럼 느껴졌다. 너무 크고 육중해서 도저히 흔들릴 것 같지가 않아 두려웠다. 두려워 흔들리는 그에게 옆방 사람이 말을 한다.

"사람은 온도를 잴 수가 없어. 하지만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영호는 묻는다.

"그렇다 해도 두려움은 남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수십년을 버텨내셨습니까?"

옆방 사람은 웃으며 답한다.

"나라고 왜 흔들리지 않겠나. 다만 그럴 때마다 지금이 99도다... 그렇게 믿어야지. 99도에서 그만두면 너무 아깝잖아."

[뜨거운 여름이 가고 선선한 가을이 왔지만 사람들의 온도는 여전히 99도라 믿는다.]



그림출처: http://image.aladdin.co.kr/cover/cover/893647166x_1.jpg

by cuspymd | 2009/09/03 01:02 | 만화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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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나스타 at 2009/09/03 10:34
100'C가 붙은 무언가를 보면 저는 조선일보에서 읽었던 100'C 인터뷰가 먼저 떠올라요. 김훈, 공지영 작가 편을 재미있게 읽었더랬죠오오

6월 항쟁,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산 사람은 잘 살아가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죠.

검색해보니, 자기 그림처럼 날이 서 있는 외모네요.
Commented by cuspymd at 2009/09/05 00:22
무수한 사람이 죽었다굽쇼? @.@

나스타님, 아마도 5.18 광주민주항쟁하고 혼동하신거 같아요.

5.18 광주민주항쟁은 79년 전두환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나서 그 이듬해 80년 5월, 정권에 반대하는 광주 시민들을 공수부대를 투입해 살인 진압한 사건이예요. 이때 나스타님 말씀대로 무수한 광주 시민들이 죽게 되죠.

6월민주 항쟁은 87년 전두환 정권 말기에, 4.12 호헌 조치(직선제 요구를 묵살하는 조치)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나자 학생과 시민들이 거국적으로 들고 일어난 사건을 말해요. 흔히 말하는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권력을 안전하게 넘기려고 했는데요. 전국적인 시위로 인해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6월29일 마침내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을 선언하며 백기를 흔들게 되죠.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있긴 했지만 그외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네요.

근데 생각해보니 위의 글에서는 정작 6월민주항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군요ㅜ.ㅜ;; 가장 중요한 걸 빠트리다니. 나스타님이 혼동하신 것도 무리가 아니예요.
Commented by 나스타 at 2009/09/05 03:37
아니에요.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텐데, 제가 무식해서 그래요. 일반사회 시간에, 공부는 하지 않고, 맨 앞자리에서 담임 얼굴만 구경하다가 이 꼴이 났어요. 아마 알고 있는 사람은 유월항쟁하면 다 알거입니다. 이런 시망. ㅠ.ㅠ
전두환하고 항쟁하면, 광주 밖에 기억나는 게 없어요. 이 무식한 블로그 이웃을 내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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